<무산일기>, 박정범 Across The Movie



윤성현의 <파수꾼>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을 받은 독립영화 <무산일기>를 봤다. 탈북자 전승철은 영화 속에서 유리창 밖의 '우리' 세상 밖에 놓여 있다. 좋아하는 여자를 좇을 때 뿐만 아니라 전승철은 꽤 많은 부분에서 유리창 밖에 놓여 있다. 카메라는 '우리'가 놓인 바깥에서 그가 놓인 유리벽 안 쪽을 비춘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배재된 채 살아가는 수많은 '전승철'이 떠올라 가슴에 얹혔다. 그들만의 세계에 사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세계와 그들의 세계가 같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 게다. 제러미 시브룩의 말이 떠오른다.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과 다른 문화 속에 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이 있는 이들에게 이롭게 만들어진 바로 그 세계에 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다른 세계 속에 살지 않는다. 그들은 주류에게 이롭게 만들어진 바로 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의미로 풀수 있다. 하나의 세계 속에서 그들을 분리시키는 유리벽은 우리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신경을 곧추 세우고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영원히 그런 벽이 있는지 조차 모른 채로 살아가기 쉽다. 그게 '편'하게 삶을 사는 방편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편'함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가 편함을 얻으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해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관심이 필요하다. 승철의 탈북자 친구 경철은 말한다. "니가 왜 친구가 없는 줄 아나? 너는 니만 알기 때문이다."라고 소리친다. 승철은 거친 숨을 내뱉고 있지만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한다. 하지만 승철이 자신만 알 수밖에 없는 이유는 타자에게 있다. 타인들은 승철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승철은 자신 밖에 알 수 없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몰린 승철에게 타인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관계 맺을 수 없다. 승철을 홀로 내버려 둔 것은 '우리'다. 

필립로스는 <휴먼 스테인>에서 "나를 빨아들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우리'라는 것의 폭정"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라는 것은 또다른 폭력을 휘두른다. 누군가를 밀어내지 못해, 뱉어내지 못해 안달이 나 있기도 하다. 무시무시한 '우리'라는 것의 폭정. 나는 어떤가. 마찬가지다. '우리'라는 것에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것에 묶이기 싫어 거부하는 동시에, 그것에 속하길 갈망한다. 누군가를 '우리'라 칭하기 싫어 밀어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우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 상대를 옭아 매려 한다.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순. 

*백구가 연기를 참 잘한다. 올해의 '개배우'상 같은 것이 있다면, 대상감. 
*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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